누구나 삶의 이면인 ‘죽음’과 ‘작별’에 대한 고민을 한다. 준비 없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떠나는 이에게도 남은 이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즘처럼 어른을 찾기 힘든 환경에서 ‘존경하는 어른’의 그러한 소식은 깊은 근심의 바다로 나를 밀어 넣는다. 떠도는 SNS에서 갑작스럽게 진지한 어느 죽음의 소식을 접할 때도 그렇다. 특히 생명력 넘치는 변화와 가르침을 이끈 ‘존경하는 어른(이글에서 어른이란 개인적인 감정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세상의 존경을 받는 스승을 의미)’의 비보는 더욱 그러하다.

이영학 작가는 현재 암으로 투병 중이다. 그는 1948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고, 1979년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다. 1981년부터 이탈리아 최고의 인체 조형 작가 에밀리오 그레코에게 수학하면서 사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닮은 꼴이 아닌, 인물의 철학과 성품을 개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한 점의 터치에도 서툰 시간을 들인 적이 없다. 독립운동가 안창호, 삼성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김수환 추기경, 장욱진 화가, 중광 스님, 구상 시인, 박경리 소설가 등 그동안 문화계, 경제계 유명인의 두상과 흉상 삼백여 점을 제작했다.
오랜 시간 자연을 관찰하며 경험한 가식 없는 결과물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새’ 조형물 연작은 그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며 한국 조형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작품들이다.

또한 전국을 누비며 모은 ‘물확’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자연의 시간 속에서 무뎌지고 패인 물확은 돌(石)의 시간을 찰나의 신비함으로 균형 있게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청동 사과와 돌, 돌과 물, 민화에서 금방 나온 듯한 호랑이와 새 연작 등.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소박함과 함축성 그리고 생명감의 조각’이라고 평가한다.

작품의 공통점은 ‘한국적 정서’이다. 물론 작품의 의미와 상징, 작품을 바라보는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작품에 대한 해석도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가변적이다. 그의 작품은 소란스럽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며 절제된 아름다움과 익살스러운 정서를 동시에 지녔다. 이것이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이다.
수유동. 성급한 마음으로 골목을 들어선다면 무표정한 작은 문을 지나치게 된다. 철옹성처럼 한 뼘의 하늘도 보이지 않는 작가의 작업실은 가족의 추억마저 생기 잃은 유물로 만들었다. 검은 부엌을 지키는 묵직한 가스레인지는 그가 아끼는 조리기구이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부터 사용했으니, 35년 된 집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
작가 이영학은 좋은 벗을 초대하여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나무 잎으로 훈제한 스테이크는 아는 사람 사이에서는 정평이 난 요리이다. 문득 손때 묻은 서랍장에 요리용 그릇을 정리하고 뒤돌아서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작가는 이 공간에서 아이 둘을 키웠다. 언제였을까? 커버린 아이들은 타국에서 각자의 보금자리를 틀었고 혼자가 된 작가는 사방의 벽을 가족사진과 편지로 그리움을 채워갔다. 가장 어여뻤던 젊은 날의 아내(심옥섭)는 액자 속에서 수줍게 웃고 있다. 여기저기 걸려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도구들이 가득한 거실을 지나 이방 저방을 돌아다니며 작가의 시간을 엿본다. 주인 없는 공간은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보다 무겁고 축축하다.
같은 날 오후, 그를 방문했다. 평소 한복을 즐겨 입었던 그가 환자복을 입고 침대 끝에 앉아 있다. 쇠약해진 모습에 짐짓 놀랬지만 이영학 작가의 표정은 여전히 온유하다.

가난한 쇠(金)의 비상(飛翔), 새
“새는 대학교 때, 지금으로 사오십 년 넘었지. 다른 사람들은 돈이 있어 가지고 철판, 동판, 이런 비싼 거를 사 가지 와서 절단해 가지고 작품을 하고 그러는데 나는 돈이 없었어요. 근근이 밥 먹고 근근이 학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엿장수들이 모아놓은 그런 데를 가보니까, 용접을 할 수 있는 연탄집게, 낫, 호미, 쇠스랑 이런 농기구들이 가정에서 쓰는 것들이 있더라고. 그것에서 시작한 것이 새예요. 1970년대니까, 그 새가 그때부터 애정을 가지고 지금 이때까지 온 거예요.”
무언의 교감, 자연의 시간
“나는 어렵게 자라서 그런지 차라리 없는 사람들한테 정이 많이 가요. 어떤 주의나 그런 거는 없어요. 새 부리 구부리는 거, 쉬운 거 같죠? 돌멩이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도 다 시간이 정해져 있어. 쇠붙이 하나, 돌멩이 하나에도 생각에 맞는 돌이 있어야 하는 거지. 뭐라고 할까? 자연 자체가 아버지 같고…. 사물의 본체에요.”
당신의 그리움
“옛날에는 돌을 파고 물을 넣지 않습니까? 그걸 내하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죠. 헐크 아저씨라고. 내보다 한 살 많아요. 아주 힘이 굉장해. 이제는 손을 흔들더라고…, 내 주변에 다 죽었더라고…. 나도 갈 때가 됐나 하지. 집사람은 심옥섭, 올해 칠십칠이야. 내와 동갑, 착한 사람이야. 동글동글하게 생겼지. 뭐 말로는 메이 퀸이라고 하더라고. 나이 먹어 그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지만(웃음), 보고 싶은 것은 물론이지.”
많은 이야기를 털어 낸 후, 그는 담배 한 대를 피우겠다며 병실을 나섰다. 작가는 덧붙이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의 무관심과 변화 속에서 생명을 잃고 쇠약해진 가위, 도끼, 칼과 못 등 무뎌진 고물(古物)에 드러난 작가의 면밀한 사려(思慮)와 비범함. 단지, 가위와 부엌칼, 대못 두 자루를 땜질한 작품일 뿐이라고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새의 시선과 몸의 각도, 다리와 발끝의 균형, 좌대의 높낮이를 유심히 살펴볼수록 그 신화(神化)를 감상할 수 있다. 물속의 먹이를 사냥하기 위한 어미 새의 팽팽한 긴장감, 땅에 발을 딛고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 새의 익살스러움. 그뿐인가? 아슬하게 균형과 불균형을 조화롭게 맞춘 좌대에서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기세의 거대한 새 등 각양각색의 모습이다.

그가 머물던 공간, 그의 고립된 시간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쇠’의 역사 문화가 자연과 혼연일체 되는 신화(神話)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낙관(落款)은 작품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무욕의 시인이 되어 상대를 경청해야>라는 글귀 위에 네 귀가 닳은 낙관이 말없이 누워있다. 아마도 세상에 들려주고 싶은 그의 이야기가 아닐까? 지난 6일부터 <이영학 회고전>을 서울옥션 강남점에서 개최한다고 하니 서둘러 가봐야겠다.
필자 서정화 박사는 서울시 대변인실, 문화비축기지(문화공원) 소장,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팀장을 역임했으며 인천대학교 미술대학과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생물자원관, KBS방송국 등에서 20여 년간 근무했다. 현재는 문화와 예술 분야에 대한 글쓰기, 전시·교육기획, 연구, 강의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STG컨설팅의 이사로 활동하면서 문화와 예술, 과학이 중소기업과 협업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